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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0   썩소 (2)


썩소
주장/정치와 경제 | 2008/05/30 21:40
2008/05/30 21:40 2008/05/30 21:40
  흔히 소통은 사람들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트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지, 이야기는 소통의 대표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런데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에서는 좀 다른 방법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그려진다.

  <타인의 삶>은 슈타지(Stasi 동독의 비밀경찰)와 감시대상의 기묘한 소통을 보여주는 영화다. 동독 정부는 정부에 비판적인 작가 한 사람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한다. 현장을 지휘하는 슈타지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슈타지는 작가도 모르게 그를 돕고, 덕분에 작가의 반정부 활동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야 작가는 자기가 도청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문서보관소에서 이제는 공개문서가 된 도청보고서를 본다. 그 보고서에는 자기를 감시했던 슈타지의 암호명이 적혀 있다.
  작가는 자기를 도운 옛 슈타지를 찾아가지만, 먼 발치서 그의 모습만 보고 자동차의 핸들을 돌린다. 얼마 후 작가는 새로운 책을 쓴다. 옛 슈타지는 그 책의 머릿글에서 옛날 자기의 암호명을 발견한다. 그는 자기에게 바친 헌사를 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슈타지는 도청 보고서로, 작가는 책으로 서로에게 자기의 뜻을 보낸다. 제대로 얘기 한 번 못해 본 그들이지만, 서로 통했다. 이게 소통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따로 있겠는가. 그의 미소가 바로 염화미소다.


  국가기관과 국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통한다. 대표적인 소통방법은 역시 말과 글이다. 대변인 논평, 기자회견, 공식 보도자료 배포는
국가기관의 전형적인 의사표현 방법이다. 국민도 각종 모임에서, 인터넷에서 여론을 일으키고 이 국민의 뜻은 언론사의 보도나 설문조사 등을 통해 국가기관에 전달된다.
  ‘어륀쥐(Orange)’,‘땅사랑’이라는 말의 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은 국민들은 총선 투표로 대답했다. 한나라당이 압승했다지만, 인수위 위원들과 장관들의 발언이 아니었으면 한나라당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중요한 소통방법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소통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행동이다. 정부는 정책집행으로, 국회는 입법과 예산심의로, 법원은 판결로 국민에게 이야기한다. 국민은 국가기관의 뜻을 확인하고 투표하고 집회에 나간다.

  어쩌다 나는 정부와 소통해버렸다. 대통령이 직접 대 국민 사과문을 ‘낭독’하기에 이르렀지만, 사과문은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정부의 행동들이 내 가슴 속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몇 가지 적어 볼까.

 1. 집회참여시민에 과잉대응하는 경찰의 행동
 2. 대통령이 쇠고기 협상 타결 보고를 받고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보도
 3. 한반도 운하 사업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
 4. 문화관광체육부 문서에 실린 멍청한 국민들은 세뇌하기도 쉽다는 글

  이 정도만 써도 충분할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은 소통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 사과를 했다. 사과문에는 정부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이 못내 안타깝다는 ‘정부의 의견’이 담겨있다. 이쯤 되면 웃기지도 않는다.
  정부의 의지는 이미 충분하게 전달됐다. 정부 대변인의 말, 대통령의 말만 들으라는 얘긴가? 선보러 나가서 상대방 입술만 쳐다보나?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 흘러나온 정부 관계자들의 말실수들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 촛불시위의 진짜 배후세력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집행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 정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냐고? 말을 믿는다는 건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나 가능하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면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취객이 “난 안 취했어!”라고 얘기한다고 해서 ‘아! 그렇구나! 저 사람은 절대 취한 게 아니야.’라고 생각할 행인이 있을까?
  말보다 행동이 진짜 그의 뜻이다.

  행동을 다 봤는데 굳이 말까지 들을 필요 있나. 정부는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면서 국민들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한다. 한 때 영특하다는 소리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부 고위 인사들이 많은 국민들의 뜻을 모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문화체육관광부 문건에 나온 얘기처럼, 국민을 바보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석가모니가 꽃을 들었을 때 가섭(迦葉)은 깨달음이 묻어난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 헌사를 본 옛 슈타지는 인간애가 묻어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정부 관계자가 얘기할 때마다 짜증이 묻어난 썩소를 짓는다.

정부에게 경고한다. 바보취급 마라. 할 일이 쌓여있지만, 내일은 시간을 비워둘 거다. 내일 광화문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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