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을 했나? 시차적응이 아직 안 된 건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어렵지 않다. 민박집은 한국사람들로 북적여 스페인도 한국도 아닌 중간계에 온 기분이 든다. 아침식사가 나오지만, 이런 민박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다.
일단 배는 채웠지만, 필요한 게 한가지 더 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에는 지도가 필요하다. 특히 스페인의 구시가처럼 복잡한 곳은 지도를 보면서 다녀야 한다. 가이드북에 딸려 나온 지도가 있지만, 믿을 게 못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현지 지도를 구하기로 했다. 지도는 근처에 있는 마요르 광장(Plaza del Mayor)의 관광안내소에서 얻을 수 있다. 민박집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걸어서 10분도 안 걸린다고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다.
<둥이.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컴퓨터로 RPG(Roll Playing Game)를 하다보면 언제나 처음이 잘 안 풀린다. 마을을 찾거나 지도를 얻는 간단한 일도 어렵게 어렵게 풀어나가기 일쑤다. 해내고 나서 돌이켜 생각하면 간단한 과정인데도 그렇게 어려웠던 건,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다. 마요르 광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가까워서 많이 헤메지는 않았다. 방향감각이 엉망인 탓을 하기보다는 익숙치 않아서라는 생각을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어쨌든, 플레이어(Game Player)는 마요르 광장을 찾아냈다. 광장 안에 들어온 플레이어는 구경에 여념이 없다. 지도는 광장 안에 있을테니 둘러보는 게 먼저다. 여기도 관광지다.
광장은 정사각형의 ☐자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조금은 음침하다. 아직 가게를 열기엔 이른 시간이기도 하다.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을 둘러보는데 지도 생각이 난다. 주위를 둘러본다. 관광안내소는 어디 있을까?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쭉 걷는다. 어딘가 있겠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있겠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어디에 있나요? 모른단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있다. 관광안내소 같지는 않지만, 공공기관 같다. 영어로 물어본다. 여기가 관광안내소인가요? 되돌아 오는 건 스페인어.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당췌 알 수 없다. 서너 사람한테 물어보다 지쳐 다른 곳으로 간다.
RPG에서도 아무에게나 말을 걸어봐야 소용 없었다. 기껏해야 날씨가 좋다느니, 장사가 잘 안 된다는 말이나 듣게 된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쓸만한 얘기를 해 줄 캐릭터는 특별한 장소에 있다. 저기 있다!
기둥 근처에서 담배피는 할아버지가 대답해주신다. 물론 스페인어다. 중요하지 않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 된다. 걱정이다. 위치 몰라 걱정이 아니라 할아버지 폐 상태가 걱정이다. 잔뜩 쉰 목소리로 얘기해주고선 다시 담배를 문다. 얼른 끊으셔야 할텐데.
할아버지가 알려준 곳으로 가 보니, 공사장 한 켠에 관광안내소 문이 있다. 그래! 보물(rare item)은 원래 이런 데에 있는 거야! 이런 게 여행의 맛이야!
마요르 광장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벌써 출출하다. 왕궁으로 가는 길에 한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한다. 햄과 치즈가 들어간 토스트에 직접 갈아 만든 오렌지 주스다. 첫 스페인식 식사다. 아주 맛있다. 여행 초반이라 난 열린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모든 걸 대한다. 입맛도... 무척이나 긍정적이다.
주문과 계산은 쉽지 않다. 난 스페인어를 거의 모른다고 할 수 있고, 식당 종업원은 ‘orange juice’를 못 알아듣는다. 그녀와 서로 통하는 단어라고는 ‘coke’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렵사리 주문을 한다. 해냈다!
계산을 하면서 나는 그녀의 발음을 따라한다. 말을 빨리 배우려면 무조건 따라하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비교적 정확히 발음한다. ‘ocho’, 숫자 8이다. 그런데, 그녀가 내 독백의 의미를 잘 못 받아들였나보다. 다시 계산기를 눌러보고 나한테 액정에 찍힌 숫자를 보여주면서 얘기한다. ‘ocho'. 계산이 확실하단다.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다.
이쯤에서 내 ‘맛’에대한 생각의 변천사를 얘기해야겠다. 지금까지 두 번의 계기를 통해 맛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한 번은 논산훈련소에서, 그 다음이 방금 전 얘기한 마드리드의 한 식당에서다.
군대에 가기 전에 한 후배에게 맛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은 혀의 미각세포와 함께 코의 후각세포로도 맛을 느낀다는 얘기였다. 미각세포가 느끼는 맛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후각세포가 가세하면서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때는 그냥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논산훈련소에서는 진지하게 다가왔다.
훈련병 시절이라 더 추웠던 겨울, 막사 앞마당에 줄을 지어 쭈그리고 앉아 교회에 다녀오면 으레껏 먹을 수 있다던 초코파이 하나를 받았다. 그냥 초코파이가 아니었다. 보물같은 초코파이였다. 001번 훈련병은 추위에 곱은 손으로 부시럭거리며 봉지를 뜯고는, 소심하게도 앞니로 살짝 베어 문다. 한 입에 씹어 삼켜버릴 수는 없다. 그건... 죄악이다. 순간 후배의 얘기가 떠오른다. 그래, 맛은 코로도 느끼는 거야. 숨을 들이킨다. 찬 공기에 초코파이의 감질맛나는 달콤한 초코향이 코에 들어온다.
이거구나!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니 더 좋다. 입 안에 퍼진 따뜻한 향이 코 속으로 몰려온다. 찐득한 크림과 질퍽해진 초코렛의 조금은 톡 쏘는 향이다. 초코파이는 녹아 온 몸으로 퍼진다.
001번 훈련병은 시린 눈을 감는다.
난 그 날 혀가 아닌 다른 기관으로도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색을 보고 냄새를 맡는다는 얘기를 듣고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마드리드의 한 식당에서 먹은 토스트는 맛에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줬다.
난... 가슴으로 맛을 느꼈다.
그 식당에서 먹었던 햄치즈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는 그 시간 그 식당에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 둥이와 먹었기 때문에 특별했다. 나중에 먹은 1인분에 20~30유로 짜리 식사들만큼이나 맛있었다. 첫 해외여행의 흥분으로 한인민박집을 나오면서부터 내 마음은 비둘기 가슴마냥 부풀었고, 그 식당에서 첫 절정에 달했다.
찬찬히 따져보면, 빵에는 기름이 너무 많았고, 조금 탄 곳도 있었다. 햄은 최상급이 아니었고, 치즈도 약간 느끼했다. 오렌지 주스는 방금 갈아 내온 거라지만, 조금 미지근했다. 유리잔에 담긴 모습도 깔끔하지 않았다. 오렌지 알맹이 몇 개가 잔 안쪽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나는 마드리드의 골목을 누비며 왕궁으로 가고 있다. 속이 허전해서 들어간 어느 작은 식당엔 현지인들이 웃고 먹고 마시며 담배를 핀다. 나는 그들을 구경하고 그들도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게다가 둥이가 내 앞에 있다. 처음으로 외국의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한다. 그네들 말 한 마디가, 손 동작 하나가 신기하고 재미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둥이와 함께 먹는 토스트가 어찌 맛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슴으로 맛 본 토스트와 주스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맛있게 식사하고나서, 안타깝게도 식당에 지도를 두고 나왔다. 다시 돌아간다. 벌써 치웠나보다. 물어보지만, 알 수 없는 스페인어만 듣다 나온다. 없다는 얘기 같다. 지도하고 인연이 없나보다.
세이브(file saving)도, 로드(file loading)도 할 수 없다. 플레이어는 그저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가이드북에 실린 작은 지도를 보기로 한다. 가다보면 관광안내소가 또 나오겠지.
낯선 곳에서 정신을 놓으면 쓴 맛을 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