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조금 걸으니 성당이 나온다. 미사중이라 구경은 포기했다. 미사중에는 관광을 금지한다는 안내글이 있다. 그래도 들어가 사진 찍는 사람들은 있다. 보기 좋지는 않다. 무신론자의 가슴에도 종교의식에 대한 경외는 아직 남아있는 것인가.
성당 바로 옆이 왕궁이다. 관광지이면서 현재 왕가(王家)가 사용하는 장소다. 스페인은 왕국이기도 하다. 독재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코가 인정해서 지속할 수 있었던 왕가. 일본처럼 이름뿐인 왕가로 알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왕가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동안 스페인의 실질적인 왕이었던 프랑코 장군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해석이 엇갈리려나? 프랑코의 계보를 잇는 이들이 아직 정계에 남아있으려나? 폭력과 정치에 대한 생각은 접고 관광지로서의 왕궁을 접하자. 오늘은 왕가의 행사도 없는 날이다. 완전한 관광지다.
왕궁. 볼 만 하다. 잘 지어놨다. 많은 방 마다 볼 게 많다.
<사자상>
해학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서 술 한 잔 거하게 한 것 같다. 중앙계단 한 켠에 앉아 있는 사자의 품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 사자를 보니 왕궁이 까다로워보이지 않는다.
<조명들. 크롭, 노이즈 제거 위해 커브 조정>
난 조명 찍는 걸 좋아한다. 예쁜 조명, 쓸쓸한 조명, 큰 조명, 작은 조명 처럼 조명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조명들에는 어떤 이름이 좋을까? <날아라 복주머니>?
<누군가의 흉상>
사람으로 북적이면서도 소리는 크지 않은 왕궁의 방들. 바닥에는 두꺼운 카페트가 깔려 있고,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춘다. 왕궁의 위엄이 사람들을 누르고 있는 걸까? 어둡다 못해 침침하기까지 한 실내에 오래 있으면 조금 답답하다. 흉상의 머리를 창 쪽으로 한 건 참 잘 한 거다. 차분해 보이는 얼굴이 창밖을 보고 있으니, 내 눈도 천천히 창으로 향한다. 화려한 실내장식보다 한 뼘 햇살이 그리울 때가 있다.
<거울의 방>
널찍한 방의 벽에는 거울들이 걸려 있다. 어떤 거울들은 높이 달려 있어서 자기를 비춰볼 수도 없다. 자기를 비출 수 없는 거울들로 뭘 비추고 싶었던 걸까?
뭔가를 비추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방에 그만큼 현란한 장식의 큼직한 거울들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 같아 보인다. 세계를 정복하는 걸로 모자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했던가? 모를 일이다.
<탁자과 의자>
빽빽히 들어찬 의자들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걸 생각하면 지금도 답답하다. 옆 사람과 어깨를 맞대어 비비적거리며 앉아서 왕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 건 고역이었을까 영광이었을까? 행여 여기서 식사라도 하다가는 바로 체하겠다.
<황금빛 왕궁>
왕궁은 구석구석이 화려하다. 이런 화려한 건축물 앞에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한숨의 의미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왕궁을 나서니 비가 그쳐 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구름은 하얗다. 햇볕은 한여름처럼 내리쬔다. 공기는 상쾌하지만 햇볕은 부담스러울 정도다. 비 오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우산을 접고 걸으니 몸이 한결 가볍다. <왕궁, 하늘, 구름. cpl 사용>
아이들을 만난다. 공원 한가득 아이들의 생기가 넘쳐 흐른다. 잔잔히 흐르지 않고 여기 저기로 경쾌하게 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맑게 갠 하늘과 잘 어울린다. 한 아이가 사진을 찍어달랜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자리를 잡고 빵을 먹는데, 서너 명의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깡총깡총 뛴다. 카메라를 들고 찍으려는 사이 아이들은 한 무리가 되어 펄쩍거린다. 정신이 없지만, 기분 좋다. 영양제 한 방 맞은 기분이다. 고맙다 얘들아.
슬슬 걸으니 스페인 광장이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주위는 자동차도로다. 광장 옆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큰 건물들이다. 사람들은 있지만, 마요르 광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사람 냄새는 없다. 콘크리트 냄새가 나는 곳이다. 건축양식의 차이인가? 아니면 주변 도로와 건물들의 영향일까? 삶 속에 들어온 공간이라기보다 콘크리트위에 약간의 때를 입힌 섬 같다. 삭막하다. 다른 날도 이럴까?
<돈키호테> 주인공들의 동상이 큼직하게 서 있지만,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다. 돈키호테 완역본을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동상과 탑에는 별 감흥이 안 생기지만, 말의 눈만큼은 인상적이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뭐라고 생각하든 늙은 말은 그저 힘들어할 뿐이다. 인물상은 판타지 속에 있지만, 동물상은 현실 속에 있다. 돌진을 외치는 주인의 명령을 받잡을 수 밖에 없는 말의 피곤한 눈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
무심하게 회색빛의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가 발랄한 색을 찾았다.
콘크리트 위에도 비는 내리고 햇볕은 내리쬐고 낙엽이 진다.
그랑비아(Grand Via. 큰 길이라는 뜻) 거리로 간다. 딱히 설명할 것도 없다. 서울의 명동 근처 같다. 곳곳에 설치된 현금인출기들을 보면서 여기가 쇼핑의 거리라는 걸 확인한다. 그랑비아 거리는 그저 숙소로 가는 길일 뿐이다. 식품점이 있는 백화점이 숙소와 가까워 좋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요즘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은 백화점에서 파는 상품들에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백화점으로 향한다. 사람 많은 곳은 서울과 다르지 않다. 길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친근하지는 않다. 명동이 싫으니 그랑비아도 매력적일 수 없다.
금방 하루가 흐른다. 걷다보니 금새 어두워지고, 다시 숙소로 간다. 현관 옆 컴퓨터에 앉아있는 한국사람들이 참 낯설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가 생소하다. 몇 시간이 지났다고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생소했던 것들이 일상같다.
어느새 편안해진 방이다. 안락해진 마드리드다. 다음 일정을 생각하면 신이 나고, 앉아있는 침대는 푹신하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